더보기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이스라엘은... 서로에게 죽이는 화살이 되었고 (8절) 물고 뜯는 승냥이가 되었으며 (11절) 서로를 광야로 만드는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12절)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향하여심판의 망치를 드셨습니다. 그리고 그 망치는 부수는 망치가 아니라, 불순물을 제거하는 연단의 망치 즉, 창조의 망치였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의 망치로 이스라엘을 새롭게 처치(아사/창조)하십니다. 녹이고(차라프/불순물을 제거), 연단(보함/돌을 조사함)하여 새롭게 하시는 것입니다. (7절)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 그 망치로... 녹아지고 연단 되어 새롭게 창조되는 성도가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그래서 서로를 죽이는 화살이 아닌 생명을 전하는 성도... 서로를 물고 뜯는 승냥이가 아닌 보호하는 목자... ..
더보기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자기의 자리가 있습니다. 해와 달도 바다와 산도 그 속에 모든 동물과 식물에게도 자기 자리가 있고... 우리 성도와 교회도 하나님께서 정하신 자리가 있습니다. 오늘도 우리가 성도로서 그리고 교회로서 서야 할 자리는 어디 일까요? 첫째,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죄를 죄로 선포하고, 죄를 책망하고 그리고 죄를 다스리는 자리입니다. 성도에게 중간지대나 회색지대는 없습니다. 둘째, 죄는 무섭게 책망하고 다스리지만, 세상을 품고 세상을 위해 눈물 흘리는 자리가 성도와 교회의 자리입니다. 예수님도 본문의 예레미야도 바로 그 자리에 서있음을 기억합시다. 셋째, 하나님과 씨름하는 자리가 우리 성도와 교회의 자리입니다. 야곱(속이는 자)은 하나님과 씨름함으로 이스라엘(하나님과 겨루어..
더보기 이스라엘은 가증한 것으로부터 마음과 삶을 돌이키지 못함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30절) 가증한 것이란 무엇입니까? 팀 켈러 목사는 ‘내가 만든 우상’에서 가증한 것(우상)은 하나님 보다 더 중요하고 크다고 여기는 모든 감정과 생각과 계획과 행위라고 말합니다. 또한 하나님은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어떤 형상도 만들지말라’고 하셨습니다. (출20:4) 이는 나를 위해 행하는 모든 종교행위가 가증한 우상 숭배임을 의미합니다. 결국 하나님 보다 내 욕망이 더 크고 중요해 질 때, 하나님이 아닌 나를 위한 열심으로 가득해질 때... 우리 교회와 가정은 도벳의 사당, 나를 위해 자녀 까지도 불에 던지는 죽임의 골짜기가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날마다 말씀 앞에서 마음과 ..
더보기 하나님이 임재하지 않는 성전은 더는 성전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배라고 부르는 기도와 찬양 그리고 말씀도 마찬가지 입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없는 그것을... 아무리 여호와의 성전이라 부르고 예배라 우겨도 그것은 거짓말이고 가짜라고 말씀하십니다. (4절) 실로의 성막, 하나님의 임재가 떠난 법궤는, 아무런 능력도 영광도 없는 그저 금 칠한 상자에 불과했음을 우리도 기억해야 합니다. (12절) 그래서 우리의 예배에 필요한 것은... 형식과 절차와 규모의 금칠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그리고 그 임재는... 하나님의 이름과 말씀과 영광이 우리의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함으로 즉, 마음과 삶을 돌이킴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오늘, 금칠 한 거짓된 예배가 아닌... 나의 길과 행위를 온전케 하는, 마음과 ..
더보기 심판의 고통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고함소리 입니다. 침몰하는 배와 같은 예루살렘, 껍데기만 남은 종교 행위로부터 떠나라는 하나님의 고함 소리입니다. (1절) 그러나 이스라엘은 심판을 통한 하나님의 고함소리를 자신들의 욕으로 여겼습니다. (10절) 부모의 훈계를 사랑으로 듣지 못하고 욕으로 듣는 어리석는 자녀의 모습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훈계, 그 심판 속에서 들리는 우리를 향하신 사랑의 고함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침몰하는 배와 같은 종교 행위와 함께 가라앉지 말고, 마음과 삶을 돌이켜 그 배에서 뛰어내려야 합니다.
더보기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을 잃어버렸습니다. 바다도 하나님이 경계로 삼으신 모래를 넘지 않는데 반해... (22절) 경외함을 잃어버린 그들은 날마다 하나님의 경계선, 그 거룩과 성결의 질서를 넘어 범죄하였습니다. (23절) 또한 이스라엘은 그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성품, 영적인 감각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들은 이른 비와 늦은 비의 은혜와 추수의 축복을 누리면서도... (24절) 이 모든 것을 주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과 영적인 감각을 잃어버린 그들은... 결국 축복의 통로가 아닌 사냥꾼이 되고 말았습니다. (26절) 이 모든 파국은, 그들이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21절) 그리고 그것은 그들이 싸칼(어리석고 지각이..
더보기 “내가 어찌 너를 용서하겠느냐... 어찌 벌하지 아니하겠으며... 보복하지 않겠느냐” (7,9절) 하나님의 ‘용서할 수 없다'는 탄식 속에는 역설적이게도 우리를 용서하시고자 하시는 그분의 간절한 마음이 담겨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헛된 맹세가 아닌, 의를 행하고 진리는 구하는 참된 예배자 한 사람을 찾으십니다. (1절) 씨앗이 있어야 열매가 있듯이... 말씀의 생명과 소망을 품은 한 사람의 예배자가 가정과 일터 그리고 교회를 회복 시키는 씨앗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멍에를 꺾고 결박을 끊은 사나운 짐승이 아닌... 주의 멍에를 함께 매고, 그 말씀의 줄에 매인 순종하고 충성하는 소와 같은 예배자를 찾으십니다. 사나운 짐승은 밭을 망치고, 충성된 소는 밭을 일구는 것처럼... 하나님은..
더보기 “이 온 땅이 황폐할 것이나 내가 진멸하지는 아니할 것이며” (27절) 하나님의 심판은 진멸(멸망)을 위한 것이 아닌 회복을 위한 징계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회복을 위한 심판 앞에 어떻게 서야 할까요? 첫째, 예레미야와 같이 그루터기의 신앙을 품고 심판 앞에 서야 합니다. 그루터기 하나가 결국 숲을 회복 시키는 것처럼, 그루터기의 신앙을 가진 한 사람을 통해 하나님은 회복의 역사를 이루실 것입니다. 둘째, 현실 너머 말씀의 성취를 바라보는 성도로 심판 앞에 서야 합니다. 모두가 현실에 취하고 마비되어 안주할 때, 예레미야는 말씀(심판)의 성취를 바라보고 탄식했습니다. (19절) 말씀의 성취를 바라보며 탄식하는 신앙을 회복해야 합니다. 이 탄식하는 신앙이 심판가운데 소망의 씨앗이 되고 회복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