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보기 십자가에 달리신 주를 보라! / 마가복음 15:16-32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목적은 단 하나... 보라는 것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구경꾼이 되지 말자고 자주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십자가를 보아야 구경꾼이 아니라 제자가 되는 것일까요? 1. 희롱하며 보지 말고 겸손하게 바라 보아야 합니다. [20절]. 희롱한다는 것은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남을 조롱함을 말합니다. 군중들은 ‘자기들의 상한 마음’을 위로하려고 하나님을 희롱하였습니다. (20, 민21:4) 우리는 희롱하는 눈이 아닌 겸손의 눈(가난한 마음)으로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희롱하는 눈에는 만나도 하찮은 것으로 보이지만(민21:5), 겸손한 눈에는 일상이 은혜입니다. 2. 머리를 흔들지 말고, 십자가에 나의 ..
더보기 주님은 그 칠흑같은 어둠을 몰아내실 빛으로, 회칠한 무덤과 같은 외식(조작)을 쓸어버릴 폭풍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달리신 십자가가 우리 인생의 빛이 되었고, 폭풍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주님이 주신 사명을 따라 제자가 된 우리가 세상의 빛이 되고 폭풍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몰아내고 쓸어버려야 할 죄의 어둠과 회칠한 무덤같은 위선은 무엇일까요? 1. 주를 멀찍이 바라보며 따라가는 베드로 [54절] 이제 베드로는 더 이상 주님과 동행하는 제자가 아니라 멀찍이 따라가는 구경꾼이 되었습니다. 당신은 구경꾼입니까 제자입니까? 2. 사람들과 함께 앉아 불을 쬐는 베드로 [54절] 베드로는 군중 속에 섞여 그들처럼 말하고 행동하며 자신을 숨기고 위장하고 있습니다. 아이러니하..
더보기 주가 잡히시던 날 그날의 현장검증 / 마가복음 14:22-42 마가는 예수님이 붙들려 가시던 범죄현장의 현장검증을 통해, 우리 안의 불의와 죄의 증거들을 찾고 고발합니다. 이제 말씀 속에서 드러나는 우리의 죄의 증거 앞에서... 증거인멸의 외식이 아닌 자복하고 회개함으로 죄에서 돌이켜 새롭게 되는 은혜를 누리시 길 바랍니다. 증거 1. 배신의 군호가 된 가룟 유다의 입맞춤 (43-45절) 입맞춤은 화해(악의가 없음)와 화평(무기가 없음)을 전하는 문안입니다. 그러나 유다의 입맞춤에는 악의와 무기가 숨겨져 있었습니다. 증거 2. 기도의 능력이 아닌 칼의 혈기를 휘두른 베드로 (43-45절) 기도에 실패한 제자는 칼의 혈기를 휘두릅니다. 그러나 영적인 위기 앞에 필요한 것은 칼의 혈기가 아닌 기도의 ..
더보기 마가는 주님과 어울리지 않는, 아니 쓸 수 없는 표현들을 통해서... 십자가 앞에 서신 주님의 고뇌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34절)는 소망이 없는 극단적 번뇌와 절망을, ‘심히 고민하여’(34절)는 슬픔이 나를 죽이고 있다는 의미의 표현입니다. 그리고 마가는 이러한 번뇌 속에서 주님이 어떻게 기도하셨는지를 보여 줌으로... 성도가 어떻게 흔들리는 세상 속에서 믿음의 반석 위에 든든히 설 것인가를 이야기 합니다. 먼저 ‘깨어 있으라’ 말씀합니다. 이는 ‘시간을 속량하라’(엡5:16) 즉 살리라는 말씀입니다. 오직 생명은 세상 일로 분주한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께 예배하는 시간에 있음을 기억합시다. 둘째, 하나님께만 기도하라고 말씀합니다. ‘아바 아버지’(36절)는 아버지를..
더보기 나는 아니지요? / 마가복음 14:12-21 주님은 무교절의 첫날 곧 유월절 양 잡는 날에, (12절) 어린양의 피가 문설주에 뿌려져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킨 것처럼, 이제 주의 피가 십자가에 뿌려서 우리를 구원하실 것을 드러내십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에 피 뿌림... 곧 주의 죽음이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랑하는 제자의 배반으로 시작될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18절) 그런데 주님의 이 처절한 선포 앞에 제자들의 반응은... “나는 아니지요” 였습니다. (19절) 주님은 당신의 죽음을 이야기 하시는데... 제자들은 주의 죽음에는 관심이 없고, 이 불길한 사건에 자신들이 휘말릴까 걱정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가시나무새와 같았습니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시인과촌장) ..
더보기 어떤 기회를 찾으십니까? / 마가복음 14:1-11 이름 모를 여인과 예수님의 제자인 가룟 유다, 두 사람 모두 자신들이 원하는 기회를 찾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기회를 붙잡기 위해서는 반드시 기회 비용이 발생합니다. 그래서 여인은 예수님을 경배할 기회를 붙들기 위해 옥합을 깨뜨렸고, 반면 예수의 제자인 가룟 유다는 자기 만족의 기회를 위해 예수를 깨뜨렸습니다. 당신은 어떤 기회를 찾고 있습니까? 주를 예배하기 위해 당신의 옥합을 깨뜨리십니까? 아니면 당신의 기회를 위해 예수(예배)를 깨뜨리십니까? 주님은 여인의 행동을 ‘좋은 일’이라고 칭찬하셨습니다. 좋은 일(칼로스)은 구약의 ‘토브’에서 파생된 헬라어 입니다. (창1장) 즉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의미입니다. 오늘도 당신의 기회비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