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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련 안디옥교회 새벽 말씀묵상입니다.

 

[사도행전 3:1-10]

 

1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2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사도행전 속에 나타나는 초대교회는 이미 관습이 되어버린 율법에 갖혀 있던 구약의 성도들에게 반짝이는 별과 같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또 온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2:47)

 

또한 오늘 본문을 통해서 성경은 구약의 교회가 가지고 있었던 한계를 넘어 초대교회가 가지고 있었던 교회의 참된 능력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구약 교회의 한계

모든 율법과 제사의 규례는 오실 메시야의 그림자였습니다. 그래서 구약의 교회는 본질과 그림자가 가지는 차이, 즉 그 한계를 가지고 있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한계는 마치 본문의 '나면서 걷지 못하던 사람'이 성전 안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성전 미문에 앉아 있는 것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율법(그림자) 만으로는 그 사람의 연약함과 모자람 그리고 부정함을 본질적으로 해결 할 수 없었기에 그는 성전 미문에 앉아 있을 수 밖에 없었고, 그래서 그 모습은 구약 교회의 한계 혹은 율법이 관습이 되어버린 세속화된 교회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주는 장면이었습니다.

 

 

교회는 율법과 세상의 한계를 넘는다!

스스로 걷지 못하던 사람, 성전 앞에는 있으나 성전 안으로들어가지 못하던 사람이 이제 스스로 성전 안으로 뛰어 들어갑니다.(8절)

 

성령 충만한 교회는 율법의 한계를 넘어 걷지 못하는 자를 뛰게하고 예배하게 하고 또한 세상의 한계를 넘어 구걸하던 입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게 합니다.

 

 

교회는 무엇으로 그 한계를 넘는가?

먼저 시간을 정해 놓고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1절 말씀은 시간을 정해서 부지런히 기도하는 베드로와 요한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기도하기로 작정한 그 사람으로부터 역사는 시작됩니다. 

 

두번째로 연합을 통해서 교회는 한계를 극복합니다. 4절의 '더불어'라는 말씀을 주목해 봅니다. 사실 베드로와 요한은 서로 어울리지 않는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베드로는 주도적인 사람이었고 요한은 우레의 아들이리고 불릴 만큼 괴팍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마 이런 성격의 사람들이 부부나 친구로 만났다면 남아나는게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이 둘은 '더불어' 기도하고 또한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세번째, 은과 금이 아니라 예수의 이름으로 한계를 넘어섭니다. 교회는 재정의 여유나 많은 성도 숫자가 아닌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든 한계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여전히 우리 눈에는 예수의 이름보다 은과 금이 더 크고 귀하게 보인다는 것입니다. 결국 교회가 주님께 기도하고 주님과 연합할 때라야만 은 금보다 예수의 이름이 더 크고 존귀하게 보이게 될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름이 보일 때가 한계를 넘어서는 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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