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보기 욥의 탄식을 들은 엘리바스는 ‘인과응보’의 법칙을 가지고 욥에게 충고합니다. 엘리바스가 주장하는 법칙은 그 내용상 틀지지 않지만... 문제는 그 법칙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전달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엘리바스의 충고에는 눈물이 없었고...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의 지식과 경험에 가두어 놓고 해석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눈물 흘리는 자들과 함께 우시며 복음을 전하셨고... 자기 생각과 경험이 아닌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고 적용하셨음을 기억합시다. 우리도 맞은 말만 하는 사람이 아닌... 이웃과 함께 울고, 내 생각과 경험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전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더보기 본문의 욥의 탄식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욥이 느끼고 있는 통증을 우리도 회복하라는 것입니다. 나병이 무서운 이유는 통증을 느끼지 못하게 하는 병증입니다. 불에 데어도 날카로운 것에 베어도 통증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더욱 몸을 상하게 합니다. 우리의 영혼도 마찬가지입니다. 죄의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영혼은 영혼의 나병에 걸린 것과 같습니다. 날마다 데이고 베이며 상처를 받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영혼의 통증을 회복해야 합니다. 세상 때문에는 아파하면서도 정작 하나님 때문에는 아파하지 않는 우리의 무감각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이... 세상에 데이고 베인 상처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치유된 흔적으로 가득해 지기를 기원합니다.

더보기 아합은 스스로에게는 관대하고 남에게는 엄격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말씀을 가지고 남을 지적하는 것에는 익숙했지만, 스스로를 성찰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이 멸하기로 작정한(헤렘) 사람인 아람의 왕을 자기 마음대로 살려 주었습니다. (42절) 이는 아이성에서 하나님의 전리품(헤렘)을 훔쳤던 아간의 죄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수7장) 성도는 말씀 앞에서 먼저 자신을 엄격하게 성찰 해야 합니다. 이 엄격함이 우리를 하나님의 것(헤렘)을 훔치는 불순종이 아닌, 하나님의 것을 구별하는 순종의 길로 가게 함을 기억합시다.

더보기 아람의 군대 앞에 이스라엘은 바람 앞에 촛불과도 같았습니다. 승리를 위해서는 아람의 왕들을 상대할 능숙한 장수와 필승의 전략이 필요해 보였습니다. (3절) 그런데 하나님은 능숙한 장수가 아닌 청년들을 세우셨고... (14절) 싸움에 가장 불리한 뜨거운 정오에 싸움을 시작하게 하셨습니다. (16절) 그리고 세상의 상식과 방법에 맞지 않았던 이 싸움의 결과는 이스라엘의 승리였습니다. 오늘 우리의 싸움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의 최선이 아닌 하나님의 방법으로 세상을 이기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더보기 세상은 하나님의 권능 앞에서도 회개하고 돌이키지 않았던... 오히려 더욱 완악하고 완고했던 이세벨과 같습니다. (2절) 그런 세상(이세벨)을 보며 엘리야는 스스로 죽기를 바랄 정도로 실망했고 좌절 했습니다. (4절) 이 모습이 어쩌면 지금 우리의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낙망한 엘리야에게 주신 하나님의 환상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큰 바람과 지진과 불 속이 아닌 세미한(파리한) 소리 가운데 당신이 계심을 보여 주셨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큰 바람과 지진과 불처럼 위세를 떨 지라도... 그것은 하나님 없는 속 빈 강정과 같음을 기억합시다. 하나님은 화려하고 재밌어 보이는 세상에 비하면... 볼품 없고 파리해 보이는 예배, 그 말씀과 기도와 찬송 가운데 계심을 기억합시다.

더보기 1 하나님의 기적은 무너진 제단이 수축될 때 일어납니다. (30절) 우리 삶의 무너진 신앙과 마음 그리고 질서와 전통이 다시 회복 될 때 하나님의 기적은 시작됩니다. 2 하나님의 기적은 불이 내릴 자리에 물을 붇는 믿음을 통해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기적은 세상의 상식을 뛰어넘는 믿음의 순종을 통해서 시작 됩니다. (33절) 3 하나님의 기적은 사람의 손 만한 작은 구름 속에 있습니다. (44절) 작고 평범한 일상 속에서 크신 하나님을 발견 할 때 기적은 시작됩니다.

더보기 드디어 엘리야는 갈멜산 위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그는 초라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아합은 왕의 권세를 가졌지만 엘리야는 도망자 였습니다. 바알의 선지자는 450명이었지만 엘리야는 혼자 였습니다. 숫자로도 힘으로도 엘리야는 세상의 상대가 되지 않아 보였습니다. 이것이 어쩌면 화려한 세상 앞에 초라하기 그지 없어 보이는 성도와 교회의 모습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21절) “응답하는 자도 없으므로... 제단 주위에서 뛰놀더라” (26절) 즉, 성경은 갈멜산 위의 크고 힘있어 보이는 그들을 절뚝거리는 자들이라고 말씀합니다. (21, 26절) 아무리 숫자가 많고 크고 화려해 보여도, 절뚝거림으로 온전함을 이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