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5장 아담의 계보에 나오는 족장들의 삶은, '하나님과 동행하며'라는 말로 묘사가 되어 있습니다. 수 백년의 삶 가운데 인생의 희로애락이 있었을 것이지만, 성경은 그저 그들이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말로 모든 걸 말해주고 있습니다. 기쁜 일, 슬픈 일, 잘 될 때, 안 될 때, 그 모든 순간의 현상과 상황이 아니라 그들이 그 때 누구와 동행 했는지를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때로 상황을 말하고 감정을 말하느라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치곤 합니다. 잘 먹고 잘 살고, 대접 받고, 누리는 것이 우리 삶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렇다고 열심히 살지 말라는 것은 아닙니다. 잘 살고 못 사는 것이 우리의 삶을 결정 짓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와 동행하느냐가 우리 삶을 경정 짓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추종자..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예수님께서는 염려의 뿌리는 아버지의 장래의 은혜에 대한 믿음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이럴 수 있습니다: “좋은 소식이 아니군요. 단순히 염려하는 기질과의 싸움에 불과한 것이라 생각했는데 사실은 더 큰 문제가 있었군요. 하나님을 신뢰하는지에 관한 더 깊은 싸움의 문제가 있었다니, 참으로 낙담되네요” 이런 반응에 저는 동의하기도 하고 동의하지 않기도 합니다. 여러분이 위가 아파서 약도 먹고 여러 종류의 식이요법도 했는데 아무 소용이 없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리고 정기 검진을 한 후 의사가 소장에 암이 있다고 말했다고 합시다. 그것이 좋은 소식이 될 수..
십일조를 수단으로 복을 구한다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십일조는 우리가 드리든지 안 드리든지 이미 하나님의 것으로 구별된 것입니다. (십일조는 내 소유가 모두 주님의 것임을 고백하는 것일 수 밖에 없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십일조를 가지고 복을 구할 자격조차 없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를 시험하여... 복을 붓지 아니하나 보라"고 하셨을까요? 9절에서 이스라엘백성은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함으로 이미 저주를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험하라 하심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때문에 십일조는, 드려서 무엇을 얻을 수 있기에 복이 아니라... 이미 도적이 되어 드릴 자격이 없는 우리가... 드릴 수 있음이, 이미 우리에게 복인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고린도전서 1장 10절에서 바울은 나뉘고 흩어진 고린도 교회를 향해서 같은 말을 하고,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 일까요? 바울파나 아볼로파 혹은 게바나 그리스도파 중에서 누군가를 정해서 그의 아바타 처럼 복제품이 되라는 말일까요? 아닐 것입니다. 바울이 요구하고 있는 같은 말과 마음 그리고 뜻은 바로 주님의 말과 마음 그리고 그분의 뜻입니다. 그걸 가지고 온전히 합하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온전히 합하라'라는 말에는 '그물을 수선하라' '만들라'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의 온전히 합하라는 요구는, 어쩌면 서로가 튼튼한 매듭으로 연결되어 그물이 되라는 요구일지도 모릅니다. 세상의 어떤 시련과 도전에도 풀어지지 않는 매듭을 만들기 위해서 우리는 그리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사랑의 수고'가 있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의 말처럼 사랑에는 수고(kovpo")가 따릅니다. kovpo" (코포스)라는 말은 고통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즉, 바울이 말하는 사랑은 힘들고 어려운 일을 해내는 것입니다. 사랑에는 수고가 있어야 합니다. 자기 감정과 느낌에 빠져서 즐거워하는 감정의 유희는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바울이 말했던 사랑의 수고는 노력이고 땀이며 피이고 눈물이라고 누군가 말했습니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사랑한다"라고 너무나 가볍운 고백을 하기 전에 먼저, 내가 그를 위해 수고하고 있는지, 노력하며 땀을 흘리고 피와 눈믈을 흘리고 있는지를 먼저 살펴야 합니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또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는 것은 그래서 '수고'가 필요합니다. 진정한 사랑..
죄의 심판으로 인한 가뭄 속에서... 선지자는 자기 동족 가운데 쉴 곳을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개걸스러운 까마귀가 오히려 선지자를 먹입니다. 그리고 이제 이방 여인인 사르밧 과부 앞에 그 선지자가 서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먹일 것을 그녀에게 요청하십니다. 아직 통의 가루는 채워지지 않았습니다. 아직 병의 기름도 채워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통의 가루가 채워지기를, 병의 기름이 채워지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아직 채워지지 않았어도... 결단의 순간 앞에서 믿음으로 한 걸음 나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일의 시작입니다. 오늘 결단의 순간 앞에서 믿음으로 반응합시다. 과부의 통에 가루가 떨어지지 않은 것처럼...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않은 것처럼... 마르지 않는 감사와 기쁨 그리고 감격을 ..
"손 잡아 주고 싶다고 발 걸지 마세요!" 모 인기 드라마의 주인공의 대사입니다. 드라마의 스토리와는 상관 없이 많은 생각을 하게 했던 대사였습니다. 우리가 드러내는 대부분의 분노와 반대 그리고 지적들은... 그것이 실제로는 진리와 참 가치를 위한 것이기 보다... 단지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싶거나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한 것일 때가 많이 있습니다. 또는 내 공로를 인정 받거나 가치를 드러내고 싶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스스로 기회를 만들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결국 손 잡아 주는 나를 드러내기 위해서 남의 발을 것은 외식(外飾)이고 폭력입니다. 정말 누군가의 손을 잡아 주고 싶다면... 주님이 우리에게 하신 것처럼 그냥 그 곁에 있어주며 함께 걸어 가면 됩니다. 주님은 우리를 구원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