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은 양을 치며 아마도 하나님께 늘 평안과 안전함을 위해 기도했을 것입니다. 자신과 기르는 양들을 위해... 특히 사자와 곰과 같은 맹수를 만나지 않기를 무엇보다 간절히 기도했을지 모릅니다. 얼마나 간절하게 기도했을까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기도에 사자와 곰을 계속 보내는 것으로 응답을 하십니다. 그래서 다윗은 기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늘 사자와 곰을 만나 싸울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다윗의 기분이 어땠을까요? 그 기분 이해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우리의 삶이라는 것도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이죠. 우리도 늘 안전함을 구하고 평탄함을 기도하는데,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매일 세상 속에서 사자와 곰을 만나는 일이 심심치 않게 일어나거든요. 신앙생활이 힘들고 어렵다는 우리의 탄식은 사실 진리에 대한 갈..
집 나간 탕자가 아니라며 안심하며 살았다. 집 나가 고생하는 이들을 보며, 내 처지가 아닌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살았다. 집 나간 탕자를 사랑의 대상으로 보지 못하고, 자아도취의 맛을 느끼기 위한 반찬거리로 삼고 살았다. 오늘 보니 난 집 안에 있는 탕자였다. 밖에 있는 탕자를 볼 때는 아무런 문제도 갈등도 없었다. 적당히 위로하고 걱정하기에 딱 좋았고, 입 바른 소리 하기에 딱 좋았다. 그런데 그 탕자가 가까이 오니 모든게 달라졌다. 손해 보는 것 같아 불편하고 억울 했다. 그 입에 발린 좋은 소리들은 온데간데없어지고, 내가 더 오래 다녔는데, 내가 더 많이 일했는데, 내가 더 많이 배웠는데 이런 생각만 머리 속에 가득해 진다. 집으로 돌아가야 할 탕자는 사실 집 안에도 있었다. 천만다행인 것은 우리 ..
사울과 바울의 차이는 육체의 모양을 가졌는가 와 예수의 흔적을 가졌는가의 차이입니다. 사울은 육체의 모양을 꾸미는 사람이었으나, 바울은 예수의 흔적으로 영혼을 가꾸는 사람이었습니다. 바로 이 차이가 삶의 태도, 생명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완전히 바꿔 놓습니다. 예수의 흔적을 지니지 못한 남편은 아내를 포기합니다. 예수의 흔적을 지니지 못한 아내는 남편을 포기합니다. 예수의 흔적을 지니지 못한 부모는 자녀를 포기합니다. 예수의 흔적을 지니지 못한 자녀는 부모를 포기합니다. 예수의 흔적을 지니지 못한 목회자는 성도를 포기합니다. 그러나 예수의 흔적을 가진 사람은 절대로 생명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갈6:17]
'태도'라는 단어의 정의 중에는 '비행기가 착륙할 때 접근하는 각도'라는 뜻이 있습니다. 작가 크리스 스파이서는... "태도와 삶의 관계는 접근하는 각도와 비행기와의 관계와 같다." 라고 말했습니다. 같은 활주로라도 접근 하는 각도에 따라 그 결과는 엄청난 차이가 납니다. 성공과 실패를 넘어서, 삶이나 죽음이의 문제가 됩니다. 우리는 같은 세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같은 문제 앞에 서있습니다. 우리는 같은 고민과 어려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삶에서 결과는 모두 다르게 나타납니다. 그 이유는 우리 앞에 있는... 세대가 다르고, 문제가 다르고, 고민이 다르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의 '태도'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날마다의 삶가운데 결정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것은... 삶의 방법이 아니라..
"소가 없으면 구유는 깨끗하려니와 소의 힘으로 얻는 것이 많으니라" 우리는 삶 속의 다양한 상황 속에서 소위 깨끗한 선택에 대한 강박관념으로 인해 아무 것도 선택하지 못하고 무력함에 빠질 때가 많이 있습니다. '소가 있어 구유가 깨끗하지 못해도 우리는 소의 유용한 존재 가치를 인정하고 소를 부릴 줄 알아야 합니다' 그저 구유를 깨끗이 하겠다고 소를 버리는 것은 어리석은 결정입니다. 무너진 가정을 보면서... 추락한 교권을 보면서... 길잃은 정치를 보면서... 타락한 교회를 보면서... 혐오하거나 아나키즘에 빠져서는 않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것은 깨끗히 치우는 것이 아니라... 소를 부려서 유익한 일을 해내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22장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 ... 가룟 유다는 입맞춤으로 예수님을 팔고 있습니다. 사랑과 존경의 표시로 행해야 할 입맞춤으로 주님을 배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원수들을 향해서 검을 빼어든 제자들을 향해 "이것까지 참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까지 참으라" "헤오스 투투 에아오" 직역하면 "여기까지 가게하라" 즉 그들의 행동을 내버려 두어 마음대로 하게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참으라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방관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의 절정은 그 다음에 나옵니다. "...이것까지 참으라 하시고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시더라" "이것까지 참으라" 이 말씀은 수동적인 인내을 말하지 않습니다. 원수의 귀를 만지는 능동적인 행동을 주님을 우리에게 보여 주십니다. 가룟 유다..
본문은 '불의한 청지기'라는 제목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의 내용은 아이러니하게도 이 불의한 청지기가 지혜있는 자로 주인에게 칭찬을 받으며 마무리가 되고 있습니다. 왜 불의한 청지기는 주인에게 칭찬을 받았을까요? 이 이상한 결말을 통해서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무엇일까? 주인의 마음에 합한 청지기는 과연 어떤 청지기일까 생각해 봅니다. 먼저 불의한 청지기를 반면교사 삼아 기억해야 할 것은, 주인과 '셈할 때'를 기억하는 청지기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2절 : "...네가 보던 일을 셈하라...") 이 샘할 때를 잊은 청지기는 마치 호랑이 없는 산에 여우처럼, 주인의 것을 제 것인 양 착각하여서 방종하고 교만해 지고 맙니다. 그래서 청지기는 반드시 '셈할 때'가 있음을 기억해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