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가 없으면 구유는 깨끗하려니와 소의 힘으로 얻는 것이 많으니라" 우리는 삶 속의 다양한 상황 속에서 소위 깨끗한 선택에 대한 강박관념으로 인해 아무 것도 선택하지 못하고 무력함에 빠질 때가 많이 있습니다. '소가 있어 구유가 깨끗하지 못해도 우리는 소의 유용한 존재 가치를 인정하고 소를 부릴 줄 알아야 합니다' 그저 구유를 깨끗이 하겠다고 소를 버리는 것은 어리석은 결정입니다. 무너진 가정을 보면서... 추락한 교권을 보면서... 길잃은 정치를 보면서... 타락한 교회를 보면서... 혐오하거나 아나키즘에 빠져서는 않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것은 깨끗히 치우는 것이 아니라... 소를 부려서 유익한 일을 해내는 것입니다.
지난 몇 주간 새벽기도회 본문이 출애굽기 였습니다. (저희 교회는 전임목사님 때부터 '생명의 말씀' 큐티 본문을 가지고 새벽기도회 말씀을 나누워 왔습니다.) 25장 이후로 계속 성막에 관한 본문이 나오고 있습니다. 낯설고 다양한 재료들, 복잡한 조립 방법... 머리 속에 성막이 그려지지 않습니다. 그래도 한 가지는 분명히 보이네요. 이 모든게 필요했던 이유 중 한가지는 성막이 움직여야 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성막은 이동식 텐트? 였습니다. 하나님의 따라 움직일 수 있어야 하는 것, 이것이 구약의 성막이 오늘 우리에게 보여주는 정말 중요한 성전의 기능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봅니다. 오늘날 교회에 나타나고 있는 많은 문제들은, 어쩌면 움직이는 이 기능을 상실한 데서 나타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벽돌..
인생 길을 가다보면 도저히 이길 수 없는 ‘대적불가(對敵不可)’의 적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 적이 사람일 수도, 환경이나 관계일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대적 할 수 없습니다. 그 대적불가의 적을 만났을 때에는 기도는 물론 신음소리조차 낼 수 없습니다. 절박한 상황입니다. 그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모압과 암몬과 세일산 주민의 감당 못할 연합군 앞에서... 여호사밧은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결단을 합니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찬양대를 선봉에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창과 칼을 앞세워도 부족할 판국에 찬양대라니 그러나 그 찬양대의 노래와 찬송이 시작될 때... 놀랍게도... 여호와의 복병이 유다의 적을 치기 시작합니다. 세상의 창검 앞에 또 다른 창검을 들고 서서는 승리할 수 없습니다. 여호와..
상반기 성경공부, 억수루바이블 '구약의 파노라마'가 오늘 끝났습니다. 올 초 중국 대련 안디옥교회에 부임하고 나서 정신이 쏙 빠질 정도로 현지 생활에 적응하고 교회에 적응해 가는 중에 사실 좀 버겁게 시작한 성경공부였는데, 많은 성도님들의 응원과 도움을 받아 한 타임을 무사히 마무리 하였습니다. 예전 청년부 사역자로 섬기던 제일성도교회의 청년부 성경프로그램이었던 일명 "억수루바이블"(walk through bible)라는 프로그램을 모티브로 강의를 준비하고 진행을 했습니다. 준비기간이 촉박했고, 중국이라는 현지의 특성상(도서관 및 책을 구할 길이 거의 없음) 준비하는 내내 힘은 들었지만, 그래도 예전 청년들과 함께 했던 그 시절도 생각이 나고, 충분하지는 않았지만 어렵게 구해 온 책들로 강의안을 만들면서..
[무지개] 기독교의 무지개는 언약의 상징입니다. 홍수 이후 하나님이 주신 무지개 언약은 단지 더이상 홍수의 심판이 없을 것이라고하는 안전표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활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무지개(합3:9)는 우리의 죄로인한 무서운 심판이 있었다는 흔적이고, 동시에 심판 가운데 하나님의 구원이 있었으며, 그 구원을 하나님께서 장차 완성해 가실 것이라는 것을 선포하는 상징입니다. 그래서 저는 무지개를 볼 때마다 심판을 기억하며 스스로를 되돌아보고, 구원을 기억하며 소망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무지개가 (우연이든 고의든) 이제 동성간결혼(성소수자의 인권)을 상징하는 아이콘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청소년들이 아무 생각없이 무슨 유행을 따라하는 것 처럼, 그리고 단지 이쁘다는 이..
[사람은 합리적인게 아니라 자기를 합리화를 하는 존재] 합리화가 무서운 건, 한 두번 하다보면 나중에는 스스로 자기 합리화를 진리로 믿어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각자가 쌓아 올린 자기 합리화의 성에서 세상을 내려다 보는 사람은, 늘 스스로 억울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또 자주 화를 내고 있는 것 같구요. 그런데 이 '이상한 나만의 성'을 스스로 허물기란 참 힘든 것 같습니다. "지혜로운 아들은 아비의 훈계를 듣는다"는 잠언의 말씀처럼(잠13:1)... 자기 합리화의 성에서 내려와 말씀 앞에 서면 무너질까요?
의인은 훈계를 좋아한다고 잠언은 말씀합니다. 그러나 실상 훈계와 징계를 좋아하기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기분 나쁘고, 자존심 상하고, 약 오르고, 창피하고, 그래서 인정하기 싫고... 하지만 잠언은 훈계와 징계를 좋아하는 그 의인이 뿌리를 견고하게 내릴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의인의 뿌리는 무엇일까 생각해봅니다. 결론은 주님의 말씀에 내린 뿌리입니다. 수 없이 많은 훈계와 징계를 통해서 말씀에 내려진 그 뿌리가 지금 우리를 서있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뿌리는 지금도 자라가야 합니다. 세상의 모진 바람과 물결 앞에서 다시 넘어지지 않기 위해서... 쉽지는 않습니다. 고통스럽고 힘들 수 있습니다. 사랑의 뿌리를 내리기 보다 미워하며 사는 것이 가슴이 후련할 수 있습니다. 용서의 뿌리를 내리기 보다 복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