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울과 바울의 차이는 육체의 모양을 가졌는가 와 예수의 흔적을 가졌는가의 차이입니다. 사울은 육체의 모양을 꾸미는 사람이었으나, 바울은 예수의 흔적으로 영혼을 가꾸는 사람이었습니다. 바로 이 차이가 삶의 태도, 생명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완전히 바꿔 놓습니다. 예수의 흔적을 지니지 못한 남편은 아내를 포기합니다. 예수의 흔적을 지니지 못한 아내는 남편을 포기합니다. 예수의 흔적을 지니지 못한 부모는 자녀를 포기합니다. 예수의 흔적을 지니지 못한 자녀는 부모를 포기합니다. 예수의 흔적을 지니지 못한 목회자는 성도를 포기합니다. 그러나 예수의 흔적을 가진 사람은 절대로 생명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갈6:17]
누가복음 22장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 ... 가룟 유다는 입맞춤으로 예수님을 팔고 있습니다. 사랑과 존경의 표시로 행해야 할 입맞춤으로 주님을 배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원수들을 향해서 검을 빼어든 제자들을 향해 "이것까지 참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까지 참으라" "헤오스 투투 에아오" 직역하면 "여기까지 가게하라" 즉 그들의 행동을 내버려 두어 마음대로 하게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참으라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방관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의 절정은 그 다음에 나옵니다. "...이것까지 참으라 하시고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시더라" "이것까지 참으라" 이 말씀은 수동적인 인내을 말하지 않습니다. 원수의 귀를 만지는 능동적인 행동을 주님을 우리에게 보여 주십니다. 가룟 유다..
본문은 '불의한 청지기'라는 제목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의 내용은 아이러니하게도 이 불의한 청지기가 지혜있는 자로 주인에게 칭찬을 받으며 마무리가 되고 있습니다. 왜 불의한 청지기는 주인에게 칭찬을 받았을까요? 이 이상한 결말을 통해서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무엇일까? 주인의 마음에 합한 청지기는 과연 어떤 청지기일까 생각해 봅니다. 먼저 불의한 청지기를 반면교사 삼아 기억해야 할 것은, 주인과 '셈할 때'를 기억하는 청지기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2절 : "...네가 보던 일을 셈하라...") 이 샘할 때를 잊은 청지기는 마치 호랑이 없는 산에 여우처럼, 주인의 것을 제 것인 양 착각하여서 방종하고 교만해 지고 맙니다. 그래서 청지기는 반드시 '셈할 때'가 있음을 기억해야 ..
고린도전서 1장 10절에서 바울은 나뉘고 흩어진 고린도 교회를 향해서 같은 말을 하고,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 일까요? 바울파나 아볼로파 혹은 게바나 그리스도파 중에서 누군가를 정해서 그의 아바타 처럼 복제품이 되라는 말일까요? 아닐 것입니다. 바울이 요구하고 있는 같은 말과 마음 그리고 뜻은 바로 주님의 말과 마음 그리고 그분의 뜻입니다. 그걸 가지고 온전히 합하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온전히 합하라'라는 말에는 '그물을 수선하라' '만들라'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의 온전히 합하라는 요구는, 어쩌면 서로가 튼튼한 매듭으로 연결되어 그물이 되라는 요구일지도 모릅니다. 세상의 어떤 시련과 도전에도 풀어지지 않는 매듭을 만들기 위해서 우리는 그리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사랑의 수고'가 있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의 말처럼 사랑에는 수고(kovpo")가 따릅니다. kovpo" (코포스)라는 말은 고통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즉, 바울이 말하는 사랑은 힘들고 어려운 일을 해내는 것입니다. 사랑에는 수고가 있어야 합니다. 자기 감정과 느낌에 빠져서 즐거워하는 감정의 유희는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바울이 말했던 사랑의 수고는 노력이고 땀이며 피이고 눈물이라고 누군가 말했습니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사랑한다"라고 너무나 가볍운 고백을 하기 전에 먼저, 내가 그를 위해 수고하고 있는지, 노력하며 땀을 흘리고 피와 눈믈을 흘리고 있는지를 먼저 살펴야 합니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또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는 것은 그래서 '수고'가 필요합니다. 진정한 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