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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대련 안디옥교회 새벽 말씀 묵상입니다.

 

[시편 72:1-11]

1 하나님이여 주의 판단력을 왕에게 주시고 주의 공의를 왕의 아들에게 주소서
2 그가 주의 백성을 공의로 재판하며 주의 가난한 자를 정의로 재판하리니
3 공의로 말미암아 산들이 백성에게 평강을 주며 작은 산들도 그리하리로다
4 그가 가난한 백성의 억울함을 풀어 주며 궁핍한 자의 자손을 구원하며 압박하는 자를 꺾으리로다
5 그들이 해가 있을 동안에도 주를 두려워하며 달이 있을 동안에도 대대로 그리하리로다
6 그는 벤 풀 위에 내리는 비 같이, 땅을 적시는 소낙비 같이 내리리니
7 그의 날에 의인이 흥왕하여 평강의 풍성함이 달이 다할 때까지 이르리로다
8 그가 바다에서부터 바다까지와 강에서부터 땅 끝까지 다스리리니
9 광야에 사는 자는 그 앞에 굽히며 그의 원수들은 티끌을 핥을 것이며
10 다시스와 섬의 왕들이 조공을 바치며 스바와 시바 왕들이 예물을 드리리로다
11 모든 왕이 그의 앞에 부복하며 모든 민족이 다 그를 섬기리로다

 

이 시편은 이상적인 이스라엘의 왕을 묘사하고 있는 '메시야 시'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에서는 이 시편을 '대강절' 예배 때 읽으며 노래했다고 합니다.

 

이 시는 메시야를 향한 찬미를 통해서, 오실 메시야의 예표로서 이스라엘의 왕은 어떠해야 하는지, 또 다시 오실 메시야를 기다리는 우리 성도의 모습은 어떠해야 하는지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 주의 판단력, 정의 / 미쉬피트 (1, 2절)

주의 판단력, '미쉬피트'란 말은 공의, 즉 '응보적 정의로 세상을 다스림'을 의미하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 '절대로 죄는 간과 할 수 없다'는 정의를 의미하는 말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불법과 거짓이 만연해 있습니다. 또한 상생과 공존이란 미명 하에 죄에 대한 입장이 모호해져 가고 있으며, 그래서 진리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세상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바로 이러한 세상을 공의로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통치적 지혜'로 다스리는 것(변화 시키는 것)이 교회와 성도의 책임입니다.

 

거짓이 지배하는 세상이 아닌 공의가 다스리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2. 주의 공의, 공의, 의 / 쩨다카 (1,2,3절)

주의 공의, '쩨다카'란 말은 실질적인 '분배의 정의'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통치는 언제나 공평하다는 의미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불평등, 차별이 만연해 있습니다. 이러한 세태를 꼬집는 말이 아마도 금수저, 은수저, 흙수저 이야기가 아닌가 합니다. 계층간의 불평등과 차별을 향한 처절하리 만큼 쓰라린 아픔이 담긴 자조적인 탄식입니다.

 

이러한 차별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교회와 성도의 역할은 다시 공평하신 주의 정의를 세우는 것입니다.

분배의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 먼저 우리의 마음 부터 공평하게 분배해야 합니다. 그러면 시간도 물질도 공평하게 흘러가기 시작할 것입니다. 

 

 

3. 평강 / 샬롬 (7절)

평강, '샬롬'이란 말은 '안녕'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를 의미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즉, 안녕이란 말은 단순히 배부르고 등 따습냐는 인사가 아니라, 사람답게, 부모답게, 자식답게, 교회답게, 성도답게 살고 있느냐는 말입니다.

 

예를 들면, 아무리 출세하고 돈을 많이 번 사람이라도 그가 부모를 버린 자식이라면 그는 안녕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또 만 명이 모이는 교회라도 주님의 사랑을 버린 교회라면 안녕한 교회가 될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지금 세상에는 출세한 사람, 성공한 사람, 배부른 사람은 많지만 안녕한 사람은 찾기 힘든 세상입니다.

이러한 세상 속에서 샬롬, 참된 안녕을 이루어가야 하는 것이 교회와 성도의 사명입니다.

 

 

다스리는 자가 백성에게 마음에 상처를 주고 그들의 가능성을 망가뜨린다면, 그 세상은 매뚜기떼가 먹어지워버린 들판과 다를 바 없습니다. (암7)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이 꼭 메뚜기떼가 지나간 들판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이 들판에는 다시 생명을 자라게 할 비가 필요합니다. (단비와 소낙비는 팔레스타인 지역에서는 생명을 자라게 하는 젖줄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바로 우리가,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교회와 성도가 세상에 대하여 단비와 소낙비 같은 존재(6절)가 되어야 합니다. 

 

주의 공의와 정의, 그리고 평강의 단비가 여러분을 통해 가정과 일터와 교회에 내리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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