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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계명(1)

* 아이들을 길들이려고 하지 말라 *

 

어느 교회학교에서나 흔하게 볼 수 있는 일이 있습니다. 물론 저학년일수록 더욱 많이 볼 수 있지만, 선생님이 피아노 건반을 한번 꽝 누루는 소리에 눈을 감고, 그리고 손을 모으고 두번째로 건반을 누르면 예배 시작 찬송을 부르는 모습입니다. 마치 노련한 조련사가 호각을 불 때 첫번째 호각 소리에는 일어서고 두번째 호각 소리에는 춤을 추고 세번째 호각 소리에는 일어서고 두번째 호각 소리에는 춤을 추고 세번째 호각 소리에는 앉는 훈련된 코끼리의 모습처럼 말입니다.

 

로보트 교회학교

우리는 이런 교육의 모습이 충실한 로보트를 만드는 교육이 아닌가 하는 반성을 해보아야 합니다. 이와 같이 선생님 말씀에 무조건 ‘아멘’하는 로보트를 만드는 교회학교 교육의 모습은 우리 주변에서 실제로 발견할 수 있는 모습일 뿐만아니라 우리의 교회에서조차 일어나고 있음을 조금만 주의깊게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경우에 사람들은 아이들을 꼼짝 못하게, 마치 군인처럼 군기를 잘 세우는 선생님을 훌륭한 교사로 잘못 이해하고 있습니다. 물론 유치부 어린이나 저학년 학생들에게 이러한 교육방법이 부분적으로 필요할지는 모르지만 그 방법은 예수가 가르쳤던 방법이 아니며, 우리가 지향해야 할 방법도 아님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 선생님들과 지도자들은 무조건 말을 잘 듣고 순종하는 아이들을 좋아합니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목사님이나 선생님 말을 듣지 않는 것이 마치 예수님께 불순종하는 것이라고 말할 때도 있습니다. 물론 때로는 이와 같은 종류의 유년주일학교 교육이 성공하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성장하여 중고생들과 청년이 되었을 때는 우리의 로보트를 만드는 교육방법이 더 이상 적용되지 않는 것을 알게 됩니다.

 

아이들에게도 적용되어서는 안된다

왜 청소년들 이상의 그룹에선 이런 종류의 교육이 잘 적용될 수 없습니까? 그것은 당연히 그들 모두가 인격적인 영적 자유를 소지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어린아이들 또한 그런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우리의 로보트교육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떄야 비로소 교육의 방향을 바꾸려 합니다. 이래서는 안됩니다. 지금 교회교육의 방향은 어린아이들에 대한 교육방법에서부터 능동적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제가 교회학교 어린이들에게 설교할 때였습니다. 나는 그 아이들에게 늘 늦게 나오거나 결석을 자주 하는 선생님들에 대해 우리 아이들은 어떻게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를 말한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선생님이 교회를 출석하지 않으면 왜 안나오셨느냐고 물어보세요…… 그리고 거짓말을 하는 선생님에게는 그 거짓말에 대하여 항의해야 합니다……”

어떻게 보면 지나치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선생님들을 너무 무시하는 것이 아니냐고 말할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아이들만 배우는 것이 아니라 선생님들 또한 끊임없이 배우고 고쳐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잘못된 선생님의 모습, 거짓스러운 가르침 등을 단지 선생님이라는 이유 때문에 무조건 침묵하게 하는 교육은 잘못된 것입니다.

 

습관적인 신앙을 만드는 교육

결국 로보트처럼 길들이는 교육은 습관적인 신앙을 만듭니다. 우리는 쉽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 습관적인 신앙은 우리 아이들이 하나님과 만나는 것을 방해합니다. 그리고 인위적인 신앙생활, 위선된 신앙을 지니게 할 위험성을 갖게 됩니다. 교회에서 선생님이 길들였기 때문에 밥벅을 때도 기도하고, 주일날 빠짐없이 교회를 가고, 성경말씀을 배우고 있지만 그런 습관은 신앙이 아니라는 겁니다. 밥먹을 때의 기도는 진정한 감사와 굶주리는 이웃을 돌아보는 기도가 되도록 해야 하고, 헌금을 하는 것은 분명히 그 이유가 있음을 말해주어야 합니다. 우리 아이들의 결단과 다짐이 들어있지 않은, 습관을 통하여 길들이는 신앙교육은 아이들 안에서 역사하시는 자유로운 성령의 활동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더욱이 그 신앙은 진정한 의미에서 삶을 통해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고, 삶을 변화시키는 교육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의 교육은 습관이 아니라 의미를 체험하는 의미체험교육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방법을 택해 보십시오

1. 자유롭게 물음 던지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아이들 스스로 그 아이들에게 맞는 신앙적인 체험과 이해를 하게 해야 합니다.

2. 타당한 방항을 하게 해야 합니다.

이 말은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아이들로 하여금 스스로 신앙의 비판적인 눈을 갖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자신의 죄를 볼 수 있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가시적인 모습을 갖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

3. 자기자신을 주장하게 해야 합니다.

우리들의 신앙은 먼저 개인적입니다. 그 아이들의 신앙을 간증하게 하고 말씀이 해을 표현하게 하십시오.

4. 길들여져 나온 대답보다 삶의 실천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해야 합니다.

단순히 오병이어의 이야기가, 다윗과 골리앗의 이야기가 왜 중요합니까?

그 이야기 속에 들어있는 뜻과 그들의 삶을 적용해서 말하게 하십시오. *

 

교사 계명(2)

절대로 아이들을 포기하지 말라

 

우리가 아이들을 가르치는 데 있어서 가자 위험한 것은 아이들에 대해 실망하고 포기하는 태도를 갖는 것입니다. 그래서 “싹수가 노란 아이”. “저 아이는 글렀어. ” , “저 아이는 가정교육이 잘못되어서 내가 어떻게 할 수 없어”하고 아이들을 단정하고 더이상 가르칠 의욕을 갖지 않는 실망과 포기의 상태가 교사들이 가장 경계해야 할 적입니다.

 

우리는 포기할 자격이 없다

 

사실 우리에게는 아이들을 포기할 자격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우리에 대해 실망하지 않으셨고,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볼 때마다 감사드리는 가장 큰 이유는 그분이 우리를 포기하지 아니하시고 끝까지 사랑하신 것 때문입니다. 주님은 자기를 세별씩이나 부인하는 베드로를 보면서 실망하거나 포기하지 않으셨으며, 당신의 자녀를 죽이려고 혈안이 되었던 파울을 싹수가 노란 아이로 취급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 대해서도 그분은 똑같은 태도를 취하고 계십니다. 또한 주님은 우리들이 가르치는 아이들에 대해서도 같은 생각을 품고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실망하고 포기할 수 있습니까? 만약 우리가 한 아이라도 포기하고 있다면 그것은 엄청난 죄인 것입니다.

 

포기는 잘못된 평가에서 나온다

 

우리가 포기하는 이유는 일반적으로 잘못 평가할 수밖에 없는 교육구조의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한국사회가 지향하는 교육은 엘리트 로보트지향 교육입니다. 공부를 잘하고, 순종 자라하고, 얌전하게 행동하는 아이들을 우대하는 교육제도입니다. 학교나 집, 심지어 교회에서조차도 이런 아이들을 우대하고 좋아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부를 못한다거나, 약간 반항기가 있거나 활동이 적극적인 아이들은 쉽게 문제아 혹은 글러먹은(잘못된, 부족한, 불량한, 나태한, 게으른, 구제불릉. . . )의 아이로 취급됩니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이러한 평가방법은 매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평가방법은 성경은 달란트가 사람마다 다른 것에 대하여 말합니다(마태 25:14-30). 이 말은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천재로, 똑똑한 사람으로만 만들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다혈질인 베드로나 요한 같은 사람도 불렀고, 세밀하고 공부도 잘한 가롯유다 같은 사람도 제자로 불었습니다. 그분은 모든 사람의 모습과 능력을 각기 인정하였습니다. 만일 지금의 교육평가 방법에 따라 예수가 제자들을 선택하였다면 가롯유다와 같은 사람만 선택하였다면 가롯유다와 같은 사람만 선택했을지 모르며, 베드로․요한․야고보같은 사람은 애초부터 배제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절대 포기하지 말라

 

몇 해 전 여름성경학교 때의 일입니다. 교회 안에서는 한참 특별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5학년이었던 한 아이가 문밖에서 울고 있었습니다. 매우 분해하는 눈치였습니다. 나는 그 아이가 누구인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 아이는 이전에 담임했던 선생님들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던 아이였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밖에 나와 있는 것은 아마 그 아이가 선생님께 야단맞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나는 그 아이를 잘 설득하였습니다. “나는 네가 활동적인 것이 참 좋다. 선생님이 속상해하는 것을 네게 이해해 주지 않을래?”

나는 그 아이가 많은 선생님과 아이들로부터 눈총을 받고 있었지게 그를 격려하고, 용기를 갖게 하는 데 촛점을 두었습니다. 그 아이가 수그러들자 나는 그 아이를 데리고 교회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를 보는 순간 담임선생님이 뭐라고 투덜대면서 자리에서 일어서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선생님들 중 몇몇은 그 아이가 교회에 나오지 않기를 은근히 바라고 있었습이다. 그들은 그 아이를 포기하고 이었던 것입니다.

 

그 아이 때문에

 

그 아이 때문에 예배가 방해받고, 그 아이 때문에 분반공부와 찬양시간이 방해받는다고 우린 쉽게 얘기합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을 해 보셨습니까? 만약 이 땅에 그 아이 한명만 있었다 할지라도 예수님은 기꺼이 그 아이 한 명을 위해 왔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교육은 쉽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사랑이 필요하고 스스로 고백해야 합니다. 그 아이 때문에 선생을 하겠다고 스스로 고백해야 합니다. 그 아이 때문에 가르치는 맛이 난다고 얘기해야 합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가 가르쳐야 할 아이는 말을 잘 듣고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이 아니라, 바로 그 아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마가2:17).

 

교사가 가져야 할 자세

우리는 주님 앞에서 교사로 봉사하는 한 우리는 실망과 포기라는 말을 사용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그분 앞에서 교사로서 가져야 할 자세는 그 아이들에 대한 믿음과 사랑일 뿐입니다.

 

교사 계명 (3)

 

* 내가 생각하는 미래가 아니라 하나님이

생각하는 미래를 보라

 

성경 전체를 통해 나타나고 있는,우리 인간들을 향한 항나님의 모습은 엄청난 인내와 열심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항상 우리들의 현재보다 미래에 초점을 두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보잘것 없는 우리 시몬을 부르실때 그의 미래를 보시고 베드로(반석)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신 것입니다. 그분의 관심은 현재보다 미래에 맞춰져 있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절망인가,하나님의 절망인가

 

우리 교사들의 문제점은 아이들의 겉모습과 행동만 보고 쉽게 평가하고 절망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자신이 포가하고 절만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도 함께 포기하고 절망할 것이라고 단정하느 데 있습니다. 분명히 판단해야 합니다. 우리의 절망인가,아니면 하나님의 절망인가?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절망이라는 단어를 품으시는 분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절망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제가 중학교 2학년때의 일이었습다. 교회를 나온지 불과 몇달 밖에 되지 않아 성탄절을 맞이하게 되엇습니다. 학생회 인원이 약 20여명 정도였기 때문에 찬양과 연극을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저도 교회를 다닌지는 얼마되지 않았지만 함께 찬양을 연습하며 준비하였습니다. 연습한 지 몇일이 지난때였습니다. 연습을 열심히 하고 있는데,전도사님이 절르 따로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저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정완아, 너는 좀 안했으면 좋겠다. ”

제가 약간의 음치였고장난도 심하게 하는 편이라서 성탄절 찬양 연습이 방해가 되었기 때문에 결정한 전도사님의 제명(?)이었습니다. 어쩌면 전도사님의 결정은 나에 대하여 실망하고 포기한 상황에서 나온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 순간 저는 무척 큰 충격과 실마을 받았습니다. 다행이도 저의 철없고 민감하지 않는 성격 때문에 아무렇지도 않게 교회를 게속 다녔고 지금은 목사가 되었지만,분명히 그 전도사님은 매우 분명한 실수를 하였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 전도사님은 나에 대해 실망을 했었지만,그러나 지금 나는 목사가 되어 있습니다. ”라는 사실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그것은 우리 아이들을 인도하시는 분은 하나님 그분 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눈을 가져라

 

우리 교사들이 가져야 할 것은 하나님이 우리 아이들을 바라보는 시각입니다. 우리의 인간적인 시각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싱 계획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린느 늘 아이들을 대할 때마다 하나님께 이렇게 물어 봐야 합니다.

“하나님,이 아이를 통해 어떤 계획을 세우고 계십니까?”

이 물음 은 모든 교사들이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믈음입니다. 바로 그때 우리는 그 아이들을 다시 볼 수 있고 재평가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느 주님의 마음을 가르쳐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해야 합니다.

우리가 잘아는성경 이야기 중에 오병이어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빈들에 있는 오천명을 보면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햇을대 안드레가 보리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마리를 가진 어린아이를 데려온 모습을 압니다. 세상의 눈으로 볼 때 안드레의 행동은 어리석고,어이 없는 행동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안드레의 손을 부끄럽게 만들지 아니하셨고,뿐만 아니라 놀라운 기적을 나타내셨습니다. 안드레는 어떻게 해서 이와 같은 행동을 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모든 제자들이 모두 절망하고 있었을 때에 안드레는 예수의 마음을 보았고,예수의 눈을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처럼 예수의 눈과 마음을 가졌던 수많은 교사들의 이야기를 압니다. 세상이 절망한 헬렌 켈러를 주님의 눈으로 본 앤 셜리반,안드레 같은 교사들을 우리는 곳곳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셨다

 

헬렌 켈러,베드로,바울,아모스,호세아 . . . 보잘것 없고 형편없던 수많은 사람들을 새롭게 만드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만드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수 있는,해야 하는 일은 하나님의 눈을 가진 채로 그분의 역사를 기대하는 마음과 믿음입니다. 우리의 교육은 반드시 이 기초에서 해야 합니다. 시인 에머슨은 “믿음이란 달걀을 보면서 병아리의 울음소리를 듣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개구장이 아이들에게서 놀라운 하나님의 사람의 모습을 보는 것,성숙한 신앙인의 모습을 보는 것,그것이 모든 교사들이 가져야 하는 믿음의 내용인 것입니다.

 

우리의 눈은

 

우리의 눈은 하나님의 눈처럼 돠어야 합니다. 우리의 관심은 하나님의 관심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이 생각하는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보는 것,그것이 우리가 갖는 비젼이어야 합니다. *

 

하남교회 아동 2부 교사 여러분 ,여러분들은 지금까지 미국 시카고 제일 연합 감리교회 교육목사이신 하정완 목사님의 강의를 들으셨습니다. 이 열가지 계명들을 마음에 새기셔서 지금 당장은 잘 되지 않지만 조금씩 생각하시면서 교육하신다면 꼭 훌륭한 교사가 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정말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러한 교사들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늘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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