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일조를 수단으로 복을 구한다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십일조는 우리가 드리든지 안 드리든지 이미 하나님의 것으로 구별된 것입니다. (십일조는 내 소유가 모두 주님의 것임을 고백하는 것일 수 밖에 없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십일조를 가지고 복을 구할 자격조차 없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를 시험하여... 복을 붓지 아니하나 보라"고 하셨을까요? 9절에서 이스라엘백성은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함으로 이미 저주를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험하라 하심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때문에 십일조는, 드려서 무엇을 얻을 수 있기에 복이 아니라... 이미 도적이 되어 드릴 자격이 없는 우리가... 드릴 수 있음이, 이미 우리에게 복인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사랑의 수고'가 있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의 말처럼 사랑에는 수고(kovpo")가 따릅니다. kovpo" (코포스)라는 말은 고통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즉, 바울이 말하는 사랑은 힘들고 어려운 일을 해내는 것입니다. 사랑에는 수고가 있어야 합니다. 자기 감정과 느낌에 빠져서 즐거워하는 감정의 유희는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바울이 말했던 사랑의 수고는 노력이고 땀이며 피이고 눈물이라고 누군가 말했습니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사랑한다"라고 너무나 가볍운 고백을 하기 전에 먼저, 내가 그를 위해 수고하고 있는지, 노력하며 땀을 흘리고 피와 눈믈을 흘리고 있는지를 먼저 살펴야 합니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또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는 것은 그래서 '수고'가 필요합니다. 진정한 사랑..
죄의 심판으로 인한 가뭄 속에서... 선지자는 자기 동족 가운데 쉴 곳을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개걸스러운 까마귀가 오히려 선지자를 먹입니다. 그리고 이제 이방 여인인 사르밧 과부 앞에 그 선지자가 서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먹일 것을 그녀에게 요청하십니다. 아직 통의 가루는 채워지지 않았습니다. 아직 병의 기름도 채워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통의 가루가 채워지기를, 병의 기름이 채워지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아직 채워지지 않았어도... 결단의 순간 앞에서 믿음으로 한 걸음 나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일의 시작입니다. 오늘 결단의 순간 앞에서 믿음으로 반응합시다. 과부의 통에 가루가 떨어지지 않은 것처럼...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않은 것처럼... 마르지 않는 감사와 기쁨 그리고 감격을 ..
"손 잡아 주고 싶다고 발 걸지 마세요!" 모 인기 드라마의 주인공의 대사입니다. 드라마의 스토리와는 상관 없이 많은 생각을 하게 했던 대사였습니다. 우리가 드러내는 대부분의 분노와 반대 그리고 지적들은... 그것이 실제로는 진리와 참 가치를 위한 것이기 보다... 단지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싶거나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한 것일 때가 많이 있습니다. 또는 내 공로를 인정 받거나 가치를 드러내고 싶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스스로 기회를 만들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결국 손 잡아 주는 나를 드러내기 위해서 남의 발을 것은 외식(外飾)이고 폭력입니다. 정말 누군가의 손을 잡아 주고 싶다면... 주님이 우리에게 하신 것처럼 그냥 그 곁에 있어주며 함께 걸어 가면 됩니다. 주님은 우리를 구원 하..
신앙은 '비(非)이성적'인 것이 아니라 '초(超)이성적'인 것입니다. 우리는 때로 나의 지극히 이성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누군가의 신앙을 비이성적이라고 비판하기도 합니다. 저역시 많은 날, 주변의 신앙인들을 향해서, 특히 부모님 세대의 신앙을 보면서 비이성적인 신앙이라고 판단하고 그래서 때로는 함부로 비판하기도 했었습니다. 물론 지금도 비이성적인 신앙은 경계해야 하는 것이 맞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목회를 하면서 많은 믿음의 사람들을 보고 경험하면서 깨닫게 되고 인정할 수 밖에 없는 한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견고하고 신실한 믿음을 바탕으로 비이성이 아닌 초이성의 신앙생활을 하는 분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얼핏보면 비이성적인 신앙 같지만, 보면 볼수록 초이성적인 즉, 이성을 초월한 삶을 살아내는 ..
어른들은 몸을 가리기 위해 옷을 입지만, 아이들은 몸을 보이기 위해 옷을 입는다고 합니다. 건강한 사람은 자기를 보이기 위해 옷을 입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가리기 위해 옷을 입는다는 말입니다. 실제로 많은 어른들이 실제 자기 몸은 가리고, 옷으로 만들어진 이미지를 자기라고 착각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목사가운이 목사를 만들지 못하고, 판사가운이 판사를 만들지 못하며, 의사가운이 의사를 만들지 못합니다. 명품 옷을 입었다고 명품 인생이 되지 않습니다. 목사의 옷을 입었지만 목사답지 못하고, 판사의 옷을 입었지만 판사답지 못하며, 의사의 옷을 입었지만 의사답지 못한 인생이 많습니다. 명품 옷을 입었지만 불량 인생이 많습니다. 문제는 옷에 있지 않습니다. 그 옷을 나를 가리기 위한 목적으로 입은 것이 문제입..
그래! 깜량도 되지 않으면서 어설프게 '사랑하는 척' '용서하는 척' 하지말고 차라리 손으로 눈이라도 가리자! 일제시대 함석헌 선생이 오산학교 교사로 활동할 때 엄혹한 상황에서 의기충천한 학생들이 일부 교사들의 언행이 마음에 안들자 교무실을 습격했던 적이 있다. 눈치챈 기성교사들이 재빨리 피신하고, 돌아가는 사정을 잘 모르는 함석헌만 앉아 있다가 학생들에게 구타를 당한 일이 있었다. 이후 학생들이 냉정을 되찾자 평소 존경하던 선생을 때렸다는 것이 송구스러워 선생을 찾아가 사죄하였다. 그러면서 물었다. “선생님께서 그때 피신하지는 않고 계시다가 손으로 눈을 가리셨는데 그건 무슨 까닭이셨습니까?” 하고 조심스럽게 묻자 허허 웃고 나서 “나야 아직 수양이 모자라 석가모니 공자나 예수처럼 너그러울 수가 없어. ..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 (민수기 12:3) 우리는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단계에서 온유함으로 관용의 단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잘못을 지적하는 것으로는 나도, 상대방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모세도 스스로 애굽인을 판단하고, 히브리인을 지적할 때에는 뜻을 품었음에도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 온유함이 온 지면의 사람들보다 더할 때, 판단과 지적이아니라 온유와 관용의 사람이 되었을 때 비로서 그는 하나님께 쓰임을 받았음을 기억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