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개] 기독교의 무지개는 언약의 상징입니다. 홍수 이후 하나님이 주신 무지개 언약은 단지 더이상 홍수의 심판이 없을 것이라고하는 안전표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활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무지개(합3:9)는 우리의 죄로인한 무서운 심판이 있었다는 흔적이고, 동시에 심판 가운데 하나님의 구원이 있었으며, 그 구원을 하나님께서 장차 완성해 가실 것이라는 것을 선포하는 상징입니다. 그래서 저는 무지개를 볼 때마다 심판을 기억하며 스스로를 되돌아보고, 구원을 기억하며 소망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무지개가 (우연이든 고의든) 이제 동성간결혼(성소수자의 인권)을 상징하는 아이콘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청소년들이 아무 생각없이 무슨 유행을 따라하는 것 처럼, 그리고 단지 이쁘다는 이..
때로 아픔은 우리가 살아 있음을 자각하게 해줍니다. 고통을 느낀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이기도 하니까요. 통증을 느낄 수 있는 감각이 없었다면, 우리는 살이 베이고 염증이 생기고 그 자리가 곪아가도록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살았을 것입니다. 결국 살 수 없었겠죠! 또 통증을 느낄 수 있기 때문에 무엇이 더 좋은 것인 줄을 알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누군가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그 안에서 느끼는 감각은, 그것이 어떤 종류의 것이라도 아직 그 관계가 살아 있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아픔이라도 뭔가를 느낄 수 있는 관계는 아직 살 수 있는 기회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진짜로 죽어 있는 관계는 아무런 감각도 느낄 수 없습니다. 무감각한 사이죠. 신앙 생활을 하면서도 늘 기쁨과 아..
[사람은 합리적인게 아니라 자기를 합리화를 하는 존재] 합리화가 무서운 건, 한 두번 하다보면 나중에는 스스로 자기 합리화를 진리로 믿어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각자가 쌓아 올린 자기 합리화의 성에서 세상을 내려다 보는 사람은, 늘 스스로 억울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또 자주 화를 내고 있는 것 같구요. 그런데 이 '이상한 나만의 성'을 스스로 허물기란 참 힘든 것 같습니다. "지혜로운 아들은 아비의 훈계를 듣는다"는 잠언의 말씀처럼(잠13:1)... 자기 합리화의 성에서 내려와 말씀 앞에 서면 무너질까요?
의인은 훈계를 좋아한다고 잠언은 말씀합니다. 그러나 실상 훈계와 징계를 좋아하기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기분 나쁘고, 자존심 상하고, 약 오르고, 창피하고, 그래서 인정하기 싫고... 하지만 잠언은 훈계와 징계를 좋아하는 그 의인이 뿌리를 견고하게 내릴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의인의 뿌리는 무엇일까 생각해봅니다. 결론은 주님의 말씀에 내린 뿌리입니다. 수 없이 많은 훈계와 징계를 통해서 말씀에 내려진 그 뿌리가 지금 우리를 서있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뿌리는 지금도 자라가야 합니다. 세상의 모진 바람과 물결 앞에서 다시 넘어지지 않기 위해서... 쉽지는 않습니다. 고통스럽고 힘들 수 있습니다. 사랑의 뿌리를 내리기 보다 미워하며 사는 것이 가슴이 후련할 수 있습니다. 용서의 뿌리를 내리기 보다 복수..
책장 속에 먼지가 뽀얗게 쌓인 스펄전 목사님의 책을 집어들어 보다가... "요셉의 창고"라는 문장 속에 깊은 묵상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싫든 좋든 각자의 창고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재물이나 건강을 쌓아 두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지식이나 명예를 쌓아 두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그 창고의 가치는 무엇으로 평가해야 할까요? 내용물을 보고, 양을 보고, 평가할까요? 아니면 창고를 만든 것 자체가 잘못일까요? 성경에서 가장 큰 창고를 만들었던 사람은 아마도 요셉일 것입니다. 7년의 기근을 견디어낼 만한 창고였으니 상상하기도 힘든 규모였을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러나 그 창고는... 어리석은 부자의 창고(눅12:16-21)나, 불의한 부자의 창고(눅16:19-31) 같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창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