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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은 '비(非)이성적'인 것이 아니라 '초(超)이성적'인 것입니다.

 

우리는 때로 나의 지극히 이성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누군가의 신앙을 비이성적이라고 비판하기도 합니다.

저역시 많은 날, 주변의 신앙인들을 향해서, 특히 부모님 세대의 신앙을 보면서 비이성적인 신앙이라고 판단하고 그래서 때로는 함부로 비판하기도 했었습니다.

 

물론 지금도 비이성적인 신앙은 경계해야 하는 것이 맞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목회를 하면서 많은 믿음의 사람들을 보고 경험하면서 깨닫게 되고 인정할 수 밖에 없는 한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견고하고 신실한 믿음을 바탕으로 비이성이 아닌 초이성의 신앙생활을 하는 분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얼핏보면 비이성적인 신앙 같지만, 보면 볼수록 초이성적인 즉, 이성을 초월한 삶을 살아내는 성도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비이성과 초이성은 실제로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만 가지고는 구별하기가 쉽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비이성과 초이성의 공유할 수 없는 차이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향한 신뢰, 믿음입니다.

 

그래서 비이성적 신앙은 상황이나 관계 그리고 기대에 따라 수시로 방향이 변하고 무엇보다 결과에 따라서 다양한 반응을 가지고 옵니다. 그러나 초이성적 신앙은 하나님을 향한 신뢰, 그 믿음을 바탕으로 하기에 상황이 변해도 관계가 변해도 기대치가 바뀌어도 그 방향이 변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다양한 결과 앞에서도 늘 한결같은 반응을 보입니다. 기뻐하고 감사하고 다시 소망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창22), 그가 100세에 얻은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로 바치는 행위는 비이성적인 신앙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그것이 믿음이라고 일체의 양보나 타협없이 선포하고 있습니다.

왜 일까요? 그 날 아브라함의 모습 속에는 그가 갈대아 우르를 떠나 아들 아삭을 얻기까지 그와 함께 하시고 인도하셨던  그 하나님을 향한 무한한 신뢰와 견고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날 부터 아브라함은 더이상 광야에 있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그 땅을 여호와 이레(하나님이 준비하신다)라 불러 주셨습니다. 

 

결국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믿음으로 이성을 초월할 때, 여호와 이레의 땅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요행이나 행운만을 바래서는 우리의 땅(가정과 일터와 모든 공동체)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초이성적인 신앙, 그 믿음으로 내가 선 곳이 '여호와 이레'의 땅으로 변회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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