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은 양을 치며 아마도 하나님께 늘 평안과 안전함을 위해 기도했을 것입니다. 자신과 기르는 양들을 위해... 특히 사자와 곰과 같은 맹수를 만나지 않기를 무엇보다 간절히 기도했을지 모릅니다. 얼마나 간절하게 기도했을까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기도에 사자와 곰을 계속 보내는 것으로 응답을 하십니다. 그래서 다윗은 기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늘 사자와 곰을 만나 싸울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다윗의 기분이 어땠을까요? 그 기분 이해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우리의 삶이라는 것도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이죠. 우리도 늘 안전함을 구하고 평탄함을 기도하는데,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매일 세상 속에서 사자와 곰을 만나는 일이 심심치 않게 일어나거든요. 신앙생활이 힘들고 어렵다는 우리의 탄식은 사실 진리에 대한 갈..
'태도'라는 단어의 정의 중에는 '비행기가 착륙할 때 접근하는 각도'라는 뜻이 있습니다. 작가 크리스 스파이서는... "태도와 삶의 관계는 접근하는 각도와 비행기와의 관계와 같다." 라고 말했습니다. 같은 활주로라도 접근 하는 각도에 따라 그 결과는 엄청난 차이가 납니다. 성공과 실패를 넘어서, 삶이나 죽음이의 문제가 됩니다. 우리는 같은 세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같은 문제 앞에 서있습니다. 우리는 같은 고민과 어려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삶에서 결과는 모두 다르게 나타납니다. 그 이유는 우리 앞에 있는... 세대가 다르고, 문제가 다르고, 고민이 다르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의 '태도'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날마다의 삶가운데 결정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것은... 삶의 방법이 아니라..
"소가 없으면 구유는 깨끗하려니와 소의 힘으로 얻는 것이 많으니라" 우리는 삶 속의 다양한 상황 속에서 소위 깨끗한 선택에 대한 강박관념으로 인해 아무 것도 선택하지 못하고 무력함에 빠질 때가 많이 있습니다. '소가 있어 구유가 깨끗하지 못해도 우리는 소의 유용한 존재 가치를 인정하고 소를 부릴 줄 알아야 합니다' 그저 구유를 깨끗이 하겠다고 소를 버리는 것은 어리석은 결정입니다. 무너진 가정을 보면서... 추락한 교권을 보면서... 길잃은 정치를 보면서... 타락한 교회를 보면서... 혐오하거나 아나키즘에 빠져서는 않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것은 깨끗히 치우는 것이 아니라... 소를 부려서 유익한 일을 해내는 것입니다.
창세기 5장 아담의 계보에 나오는 족장들의 삶은, '하나님과 동행하며'라는 말로 묘사가 되어 있습니다. 수 백년의 삶 가운데 인생의 희로애락이 있었을 것이지만, 성경은 그저 그들이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말로 모든 걸 말해주고 있습니다. 기쁜 일, 슬픈 일, 잘 될 때, 안 될 때, 그 모든 순간의 현상과 상황이 아니라 그들이 그 때 누구와 동행 했는지를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때로 상황을 말하고 감정을 말하느라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치곤 합니다. 잘 먹고 잘 살고, 대접 받고, 누리는 것이 우리 삶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렇다고 열심히 살지 말라는 것은 아닙니다. 잘 살고 못 사는 것이 우리의 삶을 결정 짓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와 동행하느냐가 우리 삶을 경정 짓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추종자..
십일조를 수단으로 복을 구한다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십일조는 우리가 드리든지 안 드리든지 이미 하나님의 것으로 구별된 것입니다. (십일조는 내 소유가 모두 주님의 것임을 고백하는 것일 수 밖에 없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십일조를 가지고 복을 구할 자격조차 없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를 시험하여... 복을 붓지 아니하나 보라"고 하셨을까요? 9절에서 이스라엘백성은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함으로 이미 저주를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험하라 하심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때문에 십일조는, 드려서 무엇을 얻을 수 있기에 복이 아니라... 이미 도적이 되어 드릴 자격이 없는 우리가... 드릴 수 있음이, 이미 우리에게 복인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죄의 심판으로 인한 가뭄 속에서... 선지자는 자기 동족 가운데 쉴 곳을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개걸스러운 까마귀가 오히려 선지자를 먹입니다. 그리고 이제 이방 여인인 사르밧 과부 앞에 그 선지자가 서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먹일 것을 그녀에게 요청하십니다. 아직 통의 가루는 채워지지 않았습니다. 아직 병의 기름도 채워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통의 가루가 채워지기를, 병의 기름이 채워지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아직 채워지지 않았어도... 결단의 순간 앞에서 믿음으로 한 걸음 나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일의 시작입니다. 오늘 결단의 순간 앞에서 믿음으로 반응합시다. 과부의 통에 가루가 떨어지지 않은 것처럼...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않은 것처럼... 마르지 않는 감사와 기쁨 그리고 감격을 ..
신앙은 '비(非)이성적'인 것이 아니라 '초(超)이성적'인 것입니다. 우리는 때로 나의 지극히 이성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누군가의 신앙을 비이성적이라고 비판하기도 합니다. 저역시 많은 날, 주변의 신앙인들을 향해서, 특히 부모님 세대의 신앙을 보면서 비이성적인 신앙이라고 판단하고 그래서 때로는 함부로 비판하기도 했었습니다. 물론 지금도 비이성적인 신앙은 경계해야 하는 것이 맞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목회를 하면서 많은 믿음의 사람들을 보고 경험하면서 깨닫게 되고 인정할 수 밖에 없는 한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견고하고 신실한 믿음을 바탕으로 비이성이 아닌 초이성의 신앙생활을 하는 분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얼핏보면 비이성적인 신앙 같지만, 보면 볼수록 초이성적인 즉, 이성을 초월한 삶을 살아내는 ..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 (민수기 12:3) 우리는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단계에서 온유함으로 관용의 단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잘못을 지적하는 것으로는 나도, 상대방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모세도 스스로 애굽인을 판단하고, 히브리인을 지적할 때에는 뜻을 품었음에도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 온유함이 온 지면의 사람들보다 더할 때, 판단과 지적이아니라 온유와 관용의 사람이 되었을 때 비로서 그는 하나님께 쓰임을 받았음을 기억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