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은 '불의한 청지기'라는 제목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의 내용은 아이러니하게도 이 불의한 청지기가 지혜있는 자로 주인에게 칭찬을 받으며 마무리가 되고 있습니다. 왜 불의한 청지기는 주인에게 칭찬을 받았을까요? 이 이상한 결말을 통해서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무엇일까? 주인의 마음에 합한 청지기는 과연 어떤 청지기일까 생각해 봅니다. 먼저 불의한 청지기를 반면교사 삼아 기억해야 할 것은, 주인과 '셈할 때'를 기억하는 청지기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2절 : "...네가 보던 일을 셈하라...") 이 샘할 때를 잊은 청지기는 마치 호랑이 없는 산에 여우처럼, 주인의 것을 제 것인 양 착각하여서 방종하고 교만해 지고 맙니다. 그래서 청지기는 반드시 '셈할 때'가 있음을 기억해야 ..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예수님께서는 염려의 뿌리는 아버지의 장래의 은혜에 대한 믿음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이럴 수 있습니다: “좋은 소식이 아니군요. 단순히 염려하는 기질과의 싸움에 불과한 것이라 생각했는데 사실은 더 큰 문제가 있었군요. 하나님을 신뢰하는지에 관한 더 깊은 싸움의 문제가 있었다니, 참으로 낙담되네요” 이런 반응에 저는 동의하기도 하고 동의하지 않기도 합니다. 여러분이 위가 아파서 약도 먹고 여러 종류의 식이요법도 했는데 아무 소용이 없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리고 정기 검진을 한 후 의사가 소장에 암이 있다고 말했다고 합시다. 그것이 좋은 소식이 될 수..
고린도전서 1장 10절에서 바울은 나뉘고 흩어진 고린도 교회를 향해서 같은 말을 하고,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 일까요? 바울파나 아볼로파 혹은 게바나 그리스도파 중에서 누군가를 정해서 그의 아바타 처럼 복제품이 되라는 말일까요? 아닐 것입니다. 바울이 요구하고 있는 같은 말과 마음 그리고 뜻은 바로 주님의 말과 마음 그리고 그분의 뜻입니다. 그걸 가지고 온전히 합하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온전히 합하라'라는 말에는 '그물을 수선하라' '만들라'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의 온전히 합하라는 요구는, 어쩌면 서로가 튼튼한 매듭으로 연결되어 그물이 되라는 요구일지도 모릅니다. 세상의 어떤 시련과 도전에도 풀어지지 않는 매듭을 만들기 위해서 우리는 그리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사랑의 수고'가 있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의 말처럼 사랑에는 수고(kovpo")가 따릅니다. kovpo" (코포스)라는 말은 고통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즉, 바울이 말하는 사랑은 힘들고 어려운 일을 해내는 것입니다. 사랑에는 수고가 있어야 합니다. 자기 감정과 느낌에 빠져서 즐거워하는 감정의 유희는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바울이 말했던 사랑의 수고는 노력이고 땀이며 피이고 눈물이라고 누군가 말했습니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사랑한다"라고 너무나 가볍운 고백을 하기 전에 먼저, 내가 그를 위해 수고하고 있는지, 노력하며 땀을 흘리고 피와 눈믈을 흘리고 있는지를 먼저 살펴야 합니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또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는 것은 그래서 '수고'가 필요합니다. 진정한 사랑..
어른들은 몸을 가리기 위해 옷을 입지만, 아이들은 몸을 보이기 위해 옷을 입는다고 합니다. 건강한 사람은 자기를 보이기 위해 옷을 입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가리기 위해 옷을 입는다는 말입니다. 실제로 많은 어른들이 실제 자기 몸은 가리고, 옷으로 만들어진 이미지를 자기라고 착각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목사가운이 목사를 만들지 못하고, 판사가운이 판사를 만들지 못하며, 의사가운이 의사를 만들지 못합니다. 명품 옷을 입었다고 명품 인생이 되지 않습니다. 목사의 옷을 입었지만 목사답지 못하고, 판사의 옷을 입었지만 판사답지 못하며, 의사의 옷을 입었지만 의사답지 못한 인생이 많습니다. 명품 옷을 입었지만 불량 인생이 많습니다. 문제는 옷에 있지 않습니다. 그 옷을 나를 가리기 위한 목적으로 입은 것이 문제입..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의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골4:2] 개인적인 차이는 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생의 1/3을 잠을 자는데 사용합니다. 나머지 2/3의 건강한 삶을 위해서 잠자는 시간은 불필요하거나 아까운 시간이 아닙니다. 문제는 우리가 깨어있었다고 생각하는 2/3의 시간들 가운데도 실상은 잠들어 있던 시간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분명 깨어 있었지만 아무 것도 기억할 수 없는 시간들, 아무 의미도 찾을 수 없던 시간들... 또 간혹 기억에서 지워 버리고 싶은 차라리 꿈이었으면 하는 시간들이 있습니다. 40년을 넘게 살아 왔지만 저 역시 잠을 잤던 13년을 뺀, 깨어 있었던 27년의 기억이 온전치 못하네요. 깨어는 있었지만 실은 잠자고 있었던 순간들이 더 많았던 것 같습니다. 본문의 말씀처럼 항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