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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의 여정: 낯설음 회복의 여정 

 

낯설게 하기’(defamiliarization) 혹은 거리두기’(distanciation)란 용어가 있다. 이 말은 러시아의 토르 쉬플로프스키란 사람이 처음 사용했던 말이다.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이 익숙해져 있는 사물을 낯설게 하면 그 사물의 본질이 보인다고 말한 데서 알 수 있듯이 원래는 문학용어다. 생각해보자. 설이나 추석 명절에 새 신발을 신고 새 옷을 입을 때 느낌은 사뭇 다르지 않던가. 발뒤축이 헐고 딱지가 생길 때까지는 신발은 아직 손님이다. 새 옷이 주는 냄새와 감촉은 여간해선 가시지 않는다. 한번 손빨래를 하여 햇볕에 짱짱하게 말린 후에야 그 싱싱하던 느낌이 수그러든다. 그러다 시간이 더 흐르면 흐를수록 그것들은 어느새 내 몸의 일부가 된다. 안경을 쓰고도 안경을 찾는 것처럼, 코고는 남편 때문에 잠 설치던 아내가 코고는 남편이 없으면 잠을 설치는 아내가 되듯이 말이다.

낯설음을 잃고 익숙해지면 편하다. 사람도 물건도 심지어 짐승도 길들여지고 자연스러워지면 대하기 쉽다. 편한 건 좋다. 그런데 그 익숙함이 주는 편안함의 대가는 상당하다. 익숙함이라는 정()은 변증법적으로 두 가지 반(, anti-thesis)을 만들어낸다. 하나는 자아 통제력 상실’(the loss of self-control)이고 다른 하나는 타자성의 상실’(the loss of otherness)이다.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는 것이다. 자동차가 편하지만 사고 날 가능성은 커지고, 투자 수익이 높을수록 리스크(risk)가 큰 것과 같다. ‘자아 통제력 상실은 다른 말로 하면 길들여짐’(accustomed)이다. ‘타자성의 상실길들임’(accustoming)이라고 할 수 있다.

 

 

길들여짐의 위험

 

내 삶의 조건에 길들여짐

편해지고 익숙해지면 더 이상 자기 자신에 대해 질문하지 않는다. 불편하지 않는 이상 모든 것에 순응하고 감각이 전하는 대로 군말 없이 받아들인다. 자신이 의식적으로 선택하지 않았으면서도 소속되어 누리고 있는 삶의 조건들이 불편하지 않으니 그냥 마땅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우리 중에 우리의 삶의 조건을 스스로 선택하여 태어난 사람은 없다. 지나온 삶을 어떤 식으로든 자신만의 인과율로 설명해보려고 하지만, 무수한 우연과 우연 사이의 간격은 보이지 않는 힘의 개입을 말하지 않고는 설명할 수 없다.

오늘의 나를 정의하고 형성하는 것이 내가 맺고 있는 관계들이다. 그런데 나의 부모, 학교, 친구, 교회, 교단, 교파, 교회의 지도자, , 이웃, 좋아하는 음식 가운데 내가 좋아하기로 작정하고 속하기로 맘먹고 정한 것이 얼마나 되던가? 어느 순간엔가 내 삶에 진입하여 내 존재의 일부가 되었을 뿐이다. 그게 문제라는 건 아니다. 누구에게나 있는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헌데 알아야 할 것이 있다. 걸리적거리는 게 없어서 편하게 느낄지 모르지만 그는 이미 어느 정도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통제력을 상실한 상태가 된다. 불행하게도 가만히 놔두면 자신은 그것을 의식하지 못한다. 모든 게 자신의 의식적인 선택과 대가를 치른 결과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를 자연스럽게 길들인 생각과 태도가 내게는 안락한 사유의 거처가 되지만, 타인에겐 타성이 되고 편견이 되고 오만이 될 수도 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게 편한 것만 옹호하는 동안 침묵과 방조를 통해 거대한 사회 구조의 폭력에 동조할 수도 있다. 명분은 누구에게나 있다. 하지만 모두에게 명분이 되는 명분은 그리 많지 않다. 소자와 약자를 외면한 명분엔 사랑이 없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다.

 

신앙의 길들여짐

 

사실 익숙함에서 비롯된 자기 통제 능력의 상실은 우리의 생각과 삶 전반에 걸쳐서 적용된다. 무엇보다도 위험한 건 바로 신앙의 길들여짐이다. 우리가 진리라고 철석같이 믿어왔던 교리나 하나님에 대한 지식도 모두 하나님을 사랑한 시대의 아들들의 경건한 고백이고, 하나님을 알기 원하는 이들의 지적인 몸부림이며, 나만의 독특한 경험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성경해석의 역사와 교회의 역사가 증명해준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신앙의 습관이나 형식에 익숙해지거나 길들여지면, 내게 편한 스타일을 중요하게 여기고 신앙의 신비와 하

님에 대한 지식을 깔끔한 몇 개의 공식으로 정리하려는 유혹을 받는다 데 있다. 자기 감각의 노예가 될 뿐 더 이상 자기 자신이 믿고 있는 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다름이 틀림이 되고, 차이와 다양성을 인정할 마음이 사라지게 된다. 하나님이 내 사유 너머에서 자유롭게 역사하시고 존재하시게 할 공간이나 여백이 내 안에 남아 있지 않은 사람이 된다. 불확정성과 불확실성 속에 역동적인 반응을 생명으로 하는 신앙의 신비 앞에서 이런 자기 충족적 순응주의는 치명적인(fatal) 태도다. 순종이라는 모험을 감행하지 않고는, 즉 시간과 삶에 대한 주도권을 하나님께 양도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없고, 하나님의 생생한 임재 대신에 낯익은 의식이나 신앙고백문만을 붙잡고는 그리스도인으로 살 수 없기 때문이다.

묵상이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원하시는 나(사랑의 사람)를 찾아가는 여정이라면, 그것은 자아통제력 상실, 길들여짐에서 벗어나는 여정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따라서 묵상은 내 신앙과 내 지식과 관계를 포함하여 나를 형성하고 있는 모든 삶의 조건을 낯설게 보고 재해

석하는 일이다.

 

 

길들임의 위험

 

길들임

 

익숙함의 두 번째 결과는 타자성의 상실길들임이다. 이는 상대방을 길들인다는 뜻이다. 자기가 길들여지는 것과는 동전의 양면이다. 어느 쪽이 먼저냐고 할 것 없이 둘은 서로가 서로에게 원인이 되고 결과가 된다. 익숙해지면 그 익숙함이 정당한 것이냐고 자기 자신에게 묻지 않는다. 이는 익숙한 존재로 다가오면 그 대상은 더 이상 자기에게 의미 있는 존재가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누군가에게 혹은 무언가에게 익숙해지면 우린 그 사람 자체나 그 삶의 조건을 의미있는 것으로 받아들이기가 어려워진다. 이게 바로 '타자성의 상실'이 뜻하는 바다.

예를 들어보자. 연애할 때는 만날 때마다 그렇게 낯설어 보이고 눈을 감아도 도대체 그렇게 좋았던 그 사람의 모습이 떠오르지 않아 다시 만나고 싶고, 그래서 만나면 이번에는 또 다른 것으로 내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 도대체 어디까지 나를 감동시키려는가? 어느새 그 사람의 말투를 흉내내고 그 사람이 좋아하는 걸 좋아하게 되는 나를 본다. 언제부턴가 난 그 사람이 좋아하는 색깔을 나도 좋아한다고 믿게

되고, 그 사람이 좋아하던 거리를 나도 제일 좋아한다고 누군가에 대답한다. 매일 아침 새로운 감동으로 나를 깨울 것이라 믿던 그 낯설음 때문에 결혼을 한다. 하지만 머지 않아 익숙해진다. 길들여진다. 자연스러워진다. 있는 듯 없는 듯 해진다. 이제 배우자로 인해 사는 게 아니라 내 길들여짐에 기대어 산다. 타자(otherness)는 없고 나만 있다. 더 심각한 건, 그 때부터 상대는 내 통제의 대상이 될 뿐 결코 나에게 영향을 주거나 감동을 주는 대상이 아니다. 누군가 그런 익숙함을 자동화라고 말한다. 더 이상 아름답지 않고 더 이상 찌릿한 자극도 없다. 정으로 산다. 한 노 교수가 수업 시간에 했던 말을 이제야 이해한다. 그분은 아내와 모든 것을 공유하지만 결코 아내의 핸드백만은 열어보지 않겠다고 맘 먹었단다. 모르는 게 남아 있을 때 타자성과 그 타자성 유지의 원천인 신비가 유지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신앙의 길들임: 타자성의 상실

 

신앙에 있어서 타자성의 상실은 자아 통제력의 상실만큼이나 치명적이다. 신앙에 있어서 타자는 하나님이고 그분의 계시인 성경이며,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이고, 그 사람이 사는 세상이다. 이런 것들에 익숙해질 때 우리는 더 이상 이런 대상들에게 영향을 받지 않는다. 성경의 많은 개념들은 한번 입력된 후로 요지부동이다. 기도가 무엇이고 교회가 무엇이고, 심지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해 더 이상 알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설명을 들어도 거기서 거기인 것 같다. 다 아는 소리를 반복하는 것만 같아진다.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것은 소통(communication)의 단절을 의미한다. 하나님도 너무 익숙한 존재일 뿐이다. 굳이 다른 설명을 들을 필요 없이 그분의 존재를 의심하지 않는다. 그분에게 예배도 드리고 돈도 갖다 바친다. 그분이 원하시고 나도 재미있으니,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도 하고 성경도 공부한다. 하지만 그것이 소통은 아니다. 소통의 도구가 오히려 소통을 가로막고 있다. 하나님을 대신해서 그런 것들이 하나님이란 관념에 길들여지게 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을 통제하기 시작한다. 타자가 없어지니 자기가 그 타자를 만들어 통제하는 것이다. 이미 자기 속에 길들여진 편견이나 선입관을 가지고 하나님 상을 만들어 간다. 자신을 불편하게 만드는 하나님에 대한 가르침은 간단히 거부하면 그만이다. 악한 인간에게 낯익은 하나님은 하나님에 대한 왜곡으로 흐르기 마련이다. 길들여진 사람에게 하나님은 더 이상 자유로운 만유의 주권자가 아니라, 알라딘의 램프에서처럼 늘 주인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어야 하는 존재가 된다.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길들여진 사람은 그렇게 사람도, 이 세상도 자기의 입맛대로 길들인다. 하나님과의 소통의 단절은 다른 하나님의 형상들과의 소통의 단절로 이어지고, 이것은 하나님이 사랑하는 세상의 고통과 아우성에 귀기울이지 않는, 세상과의 소통 단절로 이어진다. 그저 나와 내 가족을 위해서만 매진하고, 저 천국을 보장받기 위해 매진할 뿐이다.

오스왈드 챔버스의 단호한 권면을 들어보자.

만약 우리가 상투적인 종교의 발에서 상투적인 종교의 신발을 벗고, 하나님께 다가갈 때 지닌 합당치 못한 익숙함을 모두 떨쳐 버리는 경험을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다면, 과연 우리가 그분의 임재 앞에 제대로 서 본 적이 있는지 의심해볼 일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가볍게 대하고 그분에게 익숙한 사람들은 한 번도 그분을 대면해 본 적이 없는 자들이다.”

오스 기니스는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라'는 마틴 루터의 말을 우습게 만든다고 지적한 것은 맞다. 하나님을 길들인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더 이상 하나님의 권위를 주장할 수 없게 된다. 광부의 아들에 불과한 수사 루터는 1521년 보름스 회의에서 오스트리아와 브로고뉴, 베네룩스, 스페인과 나폴리의 군주요, 합스부르크 왕가의 아들이요, 대대로 내려오는 가톨릭 통치권의 상속자인 총명한 젊은 왕, 카를 5세 앞에 섰다. 하지만 그는 그 앞에서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황제보다 하나님을 더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나의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다. 나는 어떤 것도 철회할 수 없고 철회하지도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양심을 거스르는 것은 옳지도 않고 안전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를 도우소서. 아멘.”

하나님을 길들이고 하나님께 익숙한 사람들은 그분의 권위 앞에 떨지 않는다. 자기의 감각에 더 크게 보이는 권위 앞에 굴복할 것이기 때문이다. ‘낯설게 하기가 없고는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는신앙도 없다.

 

 

묵상: 낯설음의 회복의 여정

 

묵상은 나 자신과 나를 지으신 하나님,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과 나를 둘러싼 숱한 관계들을 새롭게 보게 하는 일이다. 묵상이 없고는 자유인의 삶은 없으며, 자유가 없이는 사랑도 없다. 묵상은 이 세상이 정해준 행복과 불행, 유리와 불리, 성공과 실패의 잣대를 내던지고, 하나님의 시각을 회복해가는 과정이다. 묵상을 통해 날마다 나를 갱신하는 일이 없이는 내 욕망과 기대의 노예가 된 삶에서 벗어날 수 없다. 묵상은 나 밖에서 나를 관찰하는 일이다. 내게 길들여진 하나님 밖에서 나에게 계시하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보는 일이다. 깨어진 내 질그릇에 절망하는 내가 그 틈 사이로 질그릇에 담긴 보화,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의 광채가 흘러나오는 것을 보게 하는 일이다. 그것은 우상 파괴 작업이요, 욕구의 감옥에서 빠져 나오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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