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보기 성경은 욥을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라고 정의 합니다. (1:1) 이러한 욥의 탄식은 불신에서 시작되는 불평이 아니라... 믿음에서 시작되는 탄식과도 같은 기도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도 욥과 같이 많은 시련과 고난이 찾아 올 수 있습니다. 그 고통 앞에서 하나님을 등지고 불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 보며 탄식(기도)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불평에는 응답하지 않으시지만... 탄식하는 성도에게는 응답하시는 분이심을 기억합시다.
더보기 “내가 어찌 너를 용서하겠느냐... 어찌 벌하지 아니하겠으며... 보복하지 않겠느냐” (7,9절) 하나님의 ‘용서할 수 없다'는 탄식 속에는 역설적이게도 우리를 용서하시고자 하시는 그분의 간절한 마음이 담겨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헛된 맹세가 아닌, 의를 행하고 진리는 구하는 참된 예배자 한 사람을 찾으십니다. (1절) 씨앗이 있어야 열매가 있듯이... 말씀의 생명과 소망을 품은 한 사람의 예배자가 가정과 일터 그리고 교회를 회복 시키는 씨앗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멍에를 꺾고 결박을 끊은 사나운 짐승이 아닌... 주의 멍에를 함께 매고, 그 말씀의 줄에 매인 순종하고 충성하는 소와 같은 예배자를 찾으십니다. 사나운 짐승은 밭을 망치고, 충성된 소는 밭을 일구는 것처럼... 하나님은..
더보기 “이 온 땅이 황폐할 것이나 내가 진멸하지는 아니할 것이며” (27절) 하나님의 심판은 진멸(멸망)을 위한 것이 아닌 회복을 위한 징계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회복을 위한 심판 앞에 어떻게 서야 할까요? 첫째, 예레미야와 같이 그루터기의 신앙을 품고 심판 앞에 서야 합니다. 그루터기 하나가 결국 숲을 회복 시키는 것처럼, 그루터기의 신앙을 가진 한 사람을 통해 하나님은 회복의 역사를 이루실 것입니다. 둘째, 현실 너머 말씀의 성취를 바라보는 성도로 심판 앞에 서야 합니다. 모두가 현실에 취하고 마비되어 안주할 때, 예레미야는 말씀(심판)의 성취를 바라보고 탄식했습니다. (19절) 말씀의 성취를 바라보며 탄식하는 신앙을 회복해야 합니다. 이 탄식하는 신앙이 심판가운데 소망의 씨앗이 되고 회복의 ..
더보기 민11장 본문에 등장하는 모두가 불평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도 불평하고, 모세도 불평을 합니다. 그런데 언뜻 같이 보이지만 이 둘은 전혀 다른 불평이었습니다. 하나는 불평이었고, 하나는 탄식이 었습니다. 먼저 이스라엘의 불평은 불평을 위한 불평 이었습니다. 그들의 악한 불평은 공동체를 뒤로 잡아 끄는 불평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의 결정체인 만나를 '보잘것 없다' 말합니다. 그들 자신과 자녀의 생명을 착취 당하며 얻었던 애굽의 고기를 값없이 먹었던 것이라 미화합니다. (5-6절) 공동체의 전진을 멈추게 하고, 더나가 뒤로 잡아 끄는 불평에... 하나님은 진노로 반응하십니다. 다베라의 진노를 기억합시다. (3절) 반면 모세의 불평은 불평을 위한 불평 이 아니라... 자기 사명을 위한 탄식..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은 우리에게 두 가지 반응을 동시에 일으킵니다. 바로 '기쁨'과 '탄식'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도로서 살아갈 때, 우리의 일상에는 늘 기쁨과 탄식이 공존하게 됩니다. 천국을 소망하기에 기쁘고, 또 역시 천국을 소망하기에 날마다 탄식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예수를 믿고 사업에 성공하면 만족하고, 자녀가 공부 잘하면 만족하고, 건강하면 만족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사업이 잘 되고 자녀가 잘 되고 그리고 건강해도 우리는 그 곳에 머물러 있으면 안됩니다. 힘써 천국을 소망하며 탄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천국을 소망하며 탄식하는 사람은 그 길을 가다가 사업이 망해도, 자녀가 재수, 삼수, 장수를 해도 혹은 건강을 잃어도 평안함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탄식이야 말로..